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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예 콜렉티브는 지속적으로 만들고 기록하는 일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연결의 지점들은 새로운 에너지로 확장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저널 페이지에서는 매달 이어지는 생각과 작업, 대화의 흔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록합니다. 완성보다는 과정에, 결론보다는 흐름에 집중하며 — 창작이 어떻게 계속 이어지고 닿을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nov. 2025
서울 수수지기
손이 빠른 편이다. 디자인 업무가 주어지면 틈틈이 여러 시간 고민하다가,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순간이 오면 집중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몰입한다. 그러다 보면 기세를 타 빠른 속도로 작업하게 되고, 몇 시간 바짝 에너지를 쏟고 나면 금세 힘이 소진되어 피곤해진다.
다른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감이 일상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편이다. 길을 걷다가,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우연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그 작은 불빛 하나가 스칠 때마다 놓치지 않고 따라가며 불을 키워내듯 작업한다. 그래서인지 그 에너지가 필요할 때 생기지 않거나, 갑자기 사라지거나, 오래 고여 정체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다. 디자인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특히 그런 생각에 잠식되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의 나 됨’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다시 떠올린다. 창작할 때 필요한 창의성과 지혜, 정확성, 에너지와 속도—작업에 필요한 모든 능력은 결국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주님 앞에 서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고요히 재정비한다. 작업을 할 때마다 반복되는 이 흐름은 늘 어렵지만, 주님과 함께 그 시간을 풀어나가는 일이 도전이 되고 재미있고, 때론 짜릿해서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끄시는 그 흐름에 그저 유연하게 반응하며.
날 살피시는 주 내 맘을 아시네
내가 주를 더욱 사랑하길 원하네
내 삶의 주관자 선한 길로 이끄소서
주 발 앞에 나의 삶을 드리네
주의 선하심, 그 인자하심
내 평생에 늘 함께 하시리
나의 갈 길 달려간 후에
주 얼굴 뵈리 주 품에 안기리
— WELOVE, 「날 살피시는 주」
깊은 몰입
다시 오지 않을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섭리에 맞게 흘러가는 시간이지만, 그 시공간에 온전히 몰입되어 또 한 번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힘을 찾게 되는 경험을 하게 하심에 감사하다. 2023년 필리핀 해외 선교가 내게 그랬고, 그 외에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순간들이 있지만, 콘서트처럼 시간과 공간에 완전히 잠기는 경험은 흔치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날의 공연 자체가 좋아야 하겠지만.
오랜만에 콘서트를 다녀왔다. 8월에 예매했던 공연이라 11월이 언제 오려나 했는데, 막상 그날은 너무나도 빠르게 찾아왔다. 공연은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 파트의 절반쯤은 콘서트장이라는 낯선 환경에 몸과 마음이 적응하는 시간 같았다. 그러다 사운드와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으면서, 내가 온전히 그 시공간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래가 온몸을, 온 감각을 휘감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되어 시간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이 참 오랜만이었다. 늘 마감에 쫓기고, 스스로 만들어낸 일정들까지 더해져 압박을 느끼곤 했는데, 그 모든 것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던 그 시간과 공간이 내게 엄청난 해방감을 주었다.
일상에서 분리되어 스스로를 자유케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그게 산을 오르는 일이든, 헤드셋을 끼고 숲을 거니는 일이든, 혹은 콘서트장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에 온 감각을 맡기는 일이든.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자신을 몰입시킬 때, 우리를 옥죄는 것들에서 비로소 잠시나마 풀려날 수 있는 것 같다.
이번 경험이 예상보다 깊게 나를 현재라는 감각으로 끌어당겼다. 그 시공간에 온전히 몰입된 채, 현재의 나를 모든 관계와 일정과 압박에서 잠시 분리시킬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또 한 번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힘을 되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