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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simply pure, fully whole
업의 순전함


김정열 | 수박빈티지 대표
mar. 2026

[1부: 오래된 물건들의 거처]

수수예
반갑습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열
안녕하세요. 수박 빈티지를 운영하고 있는 김정열입니다. 스스로도 ‘명함이 많다’고 말할 만큼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어요. 수박 빈티지와 수박교회를 같이 시작했고, 2015년부터 목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수는 대한예수교통합 측에서 받았지만, 수박교회는 나름의 이유로 특정 교단에 소속되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빈티지 물건을 판매하는 마켓을 기획하고 브랜딩해 5~6년 정도 운영해왔고, ‘구미래 플리마켓’은 2020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말에는 ‘호박 포크아트 갤러리’라는 골동품 가게도 새롭게 시작했어요. 지금은 이렇게 네 가지 일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수예
지금 운영하고 계신 수박빈티지는 어떻게 시작된 공간인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정열님은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정열
처음 수박빈티지를 시작할 때는 사실 공간에 투자할 여유가 전혀 없었어요.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거의 처음 본 매물에 바로 계약을 했던 기억이 나요. 먹자골목 건물 2층에 있는 8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는데, 그곳에서 시작했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어요. 이후에는 미국 빈티지를 한국적인 공간에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옥에서 2호점을 운영하게 됐어요. 

친구가 쓰던 한옥 공간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했는데, 제품이라는 게 결국 ‘무엇을 파느냐’보다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한옥이라는 공간은 저한테 하나의 실험이자 낭만이었어요. 다만 시기적으로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비즈니스적으로는 크게 좋은 결과를 내진 못했어요.

그 이후 신사동 가로수길에 자리를 잡게 됐어요. 서울 한복판에서,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거든요. 예산적인 이유로 지하 공간을 선택했지만, 천고가 높고 구조적인 요소들이 좋아서 오히려 공간을 풀어가는 데 재미가 있었어요. 지금의 수박빈티지는 그런 시간들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공간이에요. 일반적인 빈티지 숍처럼 자유롭고 러프한 느낌과, 깔끔한 편집숍의 감각 사이 어딘가의 균형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렇게 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조금씩 익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수수예
함께 운영하고 계신 수박교회와 호박 갤러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정열
수박교회는 말 그대로 신앙 공동체로서의 공간이고, 호박 갤러리는 골동품과 포크아트를 소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상점이에요. 각각 성격은 다르지만, 결국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저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안에서 기획하고, 운영하고, 방향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부: 충실함, 그 자체의 순전함] 

수수예
처음 수박빈티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정열
신학을 시작하기 전에는 남성복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옷을 좋아하긴 했지만, 막 깊이 파는 매니아 수준은 아니었고 그냥 ‘좋아하는 사람’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6살에 신학을 시작하고, 실제로 현장에서 사역을 해보니까 생각보다 잘 맞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교회 안에서 자라온 경험이 있으니까, 제가 누렸던 것들을 잘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느꼈고요.

다만 동시에, 내가 교회 시스템 안에 딱 맞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도 계속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한때는 ‘패션은 내려놔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이게 버려야 할 게 아니라 언젠가 써야 할 제 무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가 큰 준비 없이, 정말 덜컥 시작하게 된 게 수박빈티지였어요. 운도 좀 좋았던 것 같아요. 시작하고 2~3년 지나면서 빈티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시작되었고, 그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수예
수박빈티지를 시작하시면서 수박교회도 함께 개척하셨어요. 두 공간이 함께 시작된 이유가 있을까요?


정열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저한테는 ‘둘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웠어요. 빈티지 가게를 한다고 해서 목사라는 정체성을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처음 시작할 때는 이 비즈니스의 목적이 꽤 분명했어요. 선교적인 마음이 컸죠. 교회에 올 일이 없는 30~40대 남성들, 특히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빈티지 숍에는 올 수 있지 않을까, 그중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발을 들일 수 있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수박은 위장된 교회다’라는 이미지도 스스로 갖고 있었고요.


수수예
현재도 동일한 마음으로 일하고 계신가요?

정열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이 일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두는 게 맞는지 계속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헌옷을 팔아서 밥벌이를 하는 이 일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잘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거룩한 밥벌이’일 수 있지 않나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전도를 위해 일한다’기보다는, 그냥 이 일을 제대로 잘 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건 있다고 생각해요. 억지로 전하려고 하기보다, 그냥 좋은 친구가 되고, 그러다 보면 어떤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신앙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요.

결국 저는 수박빈티지를 통해 사람들이 여기서 옷을 고르는 재미를 느끼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걸 위해 제 일을 순전하게 잘 해내는 것, 그게 지금 제가 생각하는 방향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3부: 취향, 점선으로 만든 경계]

수수예
정열님의 옷장을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것이 수박빈티지의 셀렉션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정열
저는 사실 옷에 대한 사랑보다 비즈니스에 대한 흥미가 더 큰 사람이에요. 옷을 엄청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알고, 그걸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다룰 수 있는 거죠. 그래서 a부터 z까지 다 하는 멀티샵보다는, 그중에서 골라내서 묶어 보여주는 ‘큐레이팅’ 쪽이 저한테 맞는 방식이었어요. 그걸 하나의 창작처럼 생각했고요.

제가 좋아하는 기준은 한마디로 ‘슴슴함’이에요. 처음부터 강하게 오는 것보다, 나중에 계속해서 생각나는 것. 평양냉면처럼 먹을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지는 멋이요. 너무 꾸민 느낌보다는 자연스럽고, 조미료가 덜 들어간 것에 끌리는 편이에요. 초기에는 그런 취향을 ‘평양냉면 같은 멋’으로 정의하고, 미국 할아버지 같은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기도 했어요. 다만 수박빈티지는 제 취향만으로 운영되는 공간은 아니에요. 기본적인 방향은 제가 잡되, 나머지는 열어두는 편이에요. 저는 이걸 ‘점선을 긋는다’고 표현하는데, 점선으로 박스를 만들고 그 틈 사이로 직원이나 손님들의 취향도 함께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거죠.

브랜딩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한 취향을 가지되 동시에 타협할 줄 아는 거예요. “이건 안 팔아요”라고 닫아버리는 건 쉽지만, 결국 선택하고 가격을 매기고 실제로 팔리는 것까지 포함해서 전체가 하나의 작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제 취향 30%, 나머지 70%는 대중에게 열어두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고, 오히려 그 균형을 바꾸면서 비즈니스도 더 커졌다고 느껴요.


수수예
저희에게 어울릴 만한 아이템을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정열

요즘은 오히려 ‘내가 절대 안 살 것 같은 옷’을 한 번 사 입어보는 걸 추천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같은 디자이너의 아카이브 피스처럼요. 그런 걸 하나 입으면, 그 옷 하나로 이야기가 10개가 생기거든요. 어디서 왔는지, 어떤 맥락인지 찾아보게 되고요. 아니면 르 코르뷔지에가 입던 워크 자켓 같은 것도 좋아요. 그런 식으로 하나의 아이템이 취향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수수예
자신의 취향을 찾고 싶지만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정열

요즘 저는 조금 더 과하고 낯선 게 좋다고 느껴요. 미니멀은 사실 제일 안전한 선택이거든요. 크게 욕먹을 일도 없고, 무난하게 정리되니까요. 근데 가끔은 “와, 이건 진짜 미쳤다”라는 반응을 듣고 싶은 욕망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안전한 선택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취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결국 자기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왜 이걸 좋아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고르는지 글로 정리할 수 있어야 취향이 남거든요.

그리고 자연을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해요. 자연은 미니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화려하거든요. 지금 디자인은 너무 미니멀로 평준화된 느낌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인간의 본능이나 창작 욕구가 더 드러나는 쪽, 그러니까 포크아트 같은 자연스러운 표현들에 더 끌려요. 그래서 꼭 정제된 것만 고르기보다, 조금 거칠고 낯설어도 괜찮으니까 더 자유롭게, 더 터프하게 시도해보면 좋겠어요. 그게 결국 자기 취향을 만드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수수예로부터]

[수수예로부터]는 인터뷰 이후 수수예가 인터뷰이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것.

저는 그 거룩함을 세상의 일을 살아가는 업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한 이후, 거룩하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나와 하루하루 일을 하며 살아가는 내가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순전하게 업을 대한다는 것, 결국은 그 일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 어떤 일이든 제대로 하다보면, 결국엔 그 끝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일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그걸 핑계삼아 나의 업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었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두 발을 딛고 세상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 그리고 전심으로 임하는 것. 그러한 태도가 우리를 조금 더 거룩에 가까이 이끌어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정열님의 하루처럼 저 또한 오늘도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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