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희망의 예배
feb. 2026
[1부 뉴욕에서의 사역: 미지의 세계로의 이탈]
수수예
반갑습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청원안녕하세요. 저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IN2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이청원 목사입니다. IN2 교회는 작년에 맨해튼에서 20주년을 맞았고, 처음에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공동체예요. 그때 함께했던 대학생들은 이제 각자의 삶의 자리로 흩어져 성인이 되었고, 또 새로운 유학생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지금은 약 1,600명 정도가 맨해튼에 모이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따로 성전이 없다는 점이 하나의 특징인데요. 그래서 스스로를 ‘광야교회’, 약속의 땅을 향해 이동하는 유목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특성상 성도들이 2~3년 주기로 계속 바뀌다 보니, 교회 역시 고정돼 있기보다는 늘 변화 속에 있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 안에서 주로 젊은 신혼부부와 성인 사역을 맡아왔고, 예배 기획과 찬양 인도도 함께 섬겨왔습니다. 공동체가 유동적이다 보니 부서의 경계 없이 사역을 오가며 섬기고 있고요. 올해부터는 청년부 사역을 맡을 예정입니다.
수수예
서울에서 사역하시다가 뉴욕으로 가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나 결단의 순간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 선택의 과정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청원
저는 서울에 있는 소망교회에서 약 9년 정도 사역을 했어요. 교육자 연한이 거의 다 되어가던 시점이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박사 과정을 시작할지, 아니면 대학교 교목실처럼 다른 길을 가볼지에 대해서요. 실제로 지원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인을 통해 뉴욕에서 교육자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밑져야 본전이니 한 번 지원해보라”는 말에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어플라이했는데, 그날 바로 면접을 보게 됐고 생각보다 빠르게 결정까지 이어졌습니다. 비자도 한 달 만에 나왔고, 지원해서 미국에 오기까지 채 두 달 반도 걸리지 않았어요. 지금 돌아보면 참 정신없이, 뭔가에 이끌리듯 오게 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결정에 영향을 준 큰 이유 중 하나는, 소망교회에 오래 있다 보니 제 몇 년 뒤 모습이 너무 또렷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에요. 제도권 교회 안에서의 삶이 생각보다 많이 정형화돼 있고, 다음 스텝들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 틀 바깥으로 한 번쯤은 나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마음 한편에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굉장히 안정형인 편인데, 삼십대 후반을 앞두고 언제까지 안정만 추구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한 번쯤은 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선택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뉴욕에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돌아보면 그때는 저 스스로도, 주변에서도 “이게 맞다”라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수수예
그렇게 해서 막상 가시게 된 뉴욕은 어때요? 뉴욕이라는 도시는 목회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어떤 장소로 느껴지나요?
청원
처음에는 솔직히 “이게 현실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했던 것 같아요. 너무 갑작스럽게 옮기게 됐고, 미국 땅을 밟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여행으로 다른 나라들은 가봤지만 미국은 완전히 처음이었고,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역을 시작하다 보니 정신이 없고 당황스러운 순간들도 많았어요. 그래도 돌아보면, 제 삶 자체가 이동이 잦았던 편이었어요. 열일곱 살 때부터 집을 떠나 살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옮겨 다니며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이번 선택도 또 하나의 이동이긴 했는데, 이전보다 훨씬 멀고, 또 결이 다른 이동이었다는 느낌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생각보다 적응은 빨리 한 편이었어요.
뉴욕이라는 도시는 나름의 황량함이 있는 곳 같아요. 다들 워낙 바쁘고, 서로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교회 안에서는 그나마 덜하지만, 퇴근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도시가 가진 혼재함과 외로움을 계속 마주하게 되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공동체의 연대감은 오히려 여기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에요. 교회가 무척이나 가족적이에요. 교역자 가정들끼리 서로를 거의 다 알고 있고, 아이들도 늘 함께 어울리고, 사무실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자연스럽고요. 실제로 새해 첫날에는 교역자 가정들이 다 함께 모여 떡국을 먹었는데, 아이들만 해도 스무 명 가까이 되었어요.
물론 이곳의 삶이 전반적으로 척박하다 보니 서로에게 늘 충분한 여유를 내주기 어려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만큼 서로를 돕고 의지하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경험했던 공동체와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가정 중심의 연대감은 뉴욕에서 더 깊게 느끼고 있어요.
[2부 예언자적 상상력: 편집으로서의 창작]
수수예
이전에 소망교회에서 양육 교재로도 사용하셨던 윌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존 질서가 허락하지 않는 대안을 상상하고, 그것을 공적으로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데요. 목회자에게 이런 상상력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청원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강하게 남았던 키워드는 ‘부활’이었어요. 부활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걸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시는 일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상상력이라는 건 결국,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다고 여겨지는 자리에서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분명하게 닫혀 있는 게 있다면, 결국 죽음이잖아요. 권력이나 질서, 억압이나 트라우마 같은 것들도 다 그 죽음이라는 선 안에서 인간을 규정하고 제한하죠. 예언자적 상상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이 상상하지 못했던 생명이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는 이야기라고 느꼈어요.
브루그만이 말하는 예언자적 전통을 보면, 한편으로는 지금 이 현실이 슬프고 비통하다는 걸 정확하게 말해주고, 거기에 대해 울게 하는 역할이 있고요. 또 한편으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리에서 오히려 찬양하고, 경탄하고, 전혀 다른 언어를 다시 불러내는 역할이 있잖아요. 이 두 가지가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그대로 만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목회자에게 예언자적 상상력은 언제든 다시 돌아와야 할 중심이라고 느껴요. 결국 이 책은,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보게 해주는데요. 우리가 보고 있는 질서 바깥에 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기억하게 만드는 힘, 그게 예언자적 상상력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상상력은 곧 희망이고, 이 책은 결국 ‘어떻게 희망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수수예
수수예는 ‘창작’을 꽤 넓은 범주로 이해하고 있는데, 예배를 준비하는 일 또한 하나의 디자인의 영역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예배를 구성하고 순서를 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시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청원저는 예배를 하나의 연출이라고 생각해요. 연출이라는 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주 반복되면서 계속 쌓여가는 거잖아요. 그 반복과 축적을 통해 우리가 어떤 신앙의 결을 만들어가고, 또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껴요. 그런 의미에서 예배를 ‘디자인한다’는 표현은 꽤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목회자는 그걸 의식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자리라고 봐요. 신학적으로는 흔히 ‘렉스 오란디(Lex orandi)’, ‘렉스 크레덴디(Lex credendi)’라는 말을 쓰는데요. 기도의 법이 곧 믿음의 법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기도는 단순히 말로 하는 기도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식 전체, 즉 예배의 형식을 포함하거든요. 결국 예배를 어떤 방식으로 드리느냐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이미 말해주고 있다는 거죠. 예배의 구조나 찬양 콘티 하나하나도 다 우리가 믿는 바를 연출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래서 예배를 디자인한다는 건 두 가지 과제가 함께 따라와요. 하나는 신학적으로 이게 정당한가를 분별하는 눈이고, 또 하나는 그 내용을 예배와 설교, 전체 이야기 속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에요. 저는 이걸 한마디로 ‘편집’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요소를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가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거든요. 이 순서의 문제는 사실 신학적으로도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에요. 구원의 순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교단이 나뉘듯이, 예배 안에서도 회개를 먼저 둘 것인지, 참여를 먼저 열어둘 것인지 같은 선택들이 결국 어떤 신앙의 형태를 만들 것인가와 직결돼요. 그래서 저는 사역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대고 하는 거라고 자주 말해요.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반복을 통해 무엇이 쌓이고 있는가, 그게 언제 어떻게 삶으로 드러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순서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반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껴요. 그런 의미에서 리터지(liturgy), 반복을 통해 거룩을 향해 가는 이 구조는 목회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언어라고 생각해요.
수수예
그럼 청원님이 예배를 디자인하는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중심이 되는 예배의 순서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청원
저에게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자연스럽게 누적되었던 예배의 순서는 찬양 인도였던 것 같아요. 찬양 콘티를 짤 때도 제가 좋아하는 곡들로 구성하지는 않거든요. 보통은 예배의 주제나 설교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이 먼저 정해지고, 그다음에 가사들을 쭉 살펴봐요. 이 가사들의 흐름이 어떤 메시지의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는지가 중요해요. 예를 들어 마지막 곡이 “주는 완전합니다”라면, 그 고백 이후에 어떤 곡을 이어서 부를지 고민하게 돼요. ‘하나님은 완전하시다’는 고백에서 멈출 것인지, 아니면 그 완전하신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신다는 자리까지 다시 가져올 것인지, 혹은 아예 나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열리게 만들 것인지요. 그 방향에 맞는 가사와 찬양의 맥락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면서 배치하게 돼요.
설교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어떤 예화를 어디에 둘지, 어떤 비유를 앞에 놓고 어떤 이야기를 뒤에 둘지, 심지어 조사 하나의 뉘앙스까지도 이 메시지가 어디를 향해 가게 할 것인가와 연결돼 있다고 느껴요. 결국 각각의 꼭지들이 어떤 방향을 향해 조합되는지가 중요하죠. 그래서 저는 창의력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편집’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이미 주어진 것들, 이미 만들어진 언어와 이야기들을 어떤 순서로 배열하고, 어떤 방식으로 녹여내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설교, 찬양 인도, 예배 기획과 순서 구성은 다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고 느껴요. 결국 어떤 순서로, 무엇을 향해 예배를 이끌어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수수예
예배 순서 중 개인적으로 가장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서가 있나요?
청원
저는 예배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간이 성찬이에요. 거의 화룡점정에 가깝다고 느껴요.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에 놓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종교개혁 이후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성적으로 계몽되고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가를 중요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성찬은 종종 뒤로 밀려났어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반복되는 의례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사실 많은 교회에서 예배의 목적지는 설교가 아니라 성찬인 것 같아요. 설교로 들은 메시지를 실제 삶으로, 몸으로 가져오게 만드는 순서가 바로 성찬이거든요.
성찬의 첫 번째 의미는 ‘구체화’라고 생각해요. 공동체가 함께 들은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 내 몸과 삶 안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단순히 듣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메시지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로 이어지게 만드는 순간이죠. 또 하나 중요한 건, 성찬이 우리를 하나로 모아준다는 점이에요. 우리가 ‘하나 되자’를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함께 바라볼 때 그 안에서 형제자매를 만나게 된다는 거죠. 한 떡을 떼어 먹는다는 건 각자 흩어진 떡을 받는 게 아니라, 한 떡에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고, 그리스도께 연합된다는 고백이기도 해요.
그래서 성찬 안에는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서는 굉장히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어요. 예수님이 만유의 주님이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이 세상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고백까지 포함되죠. 그런 의미들이 성찬 안에서 한꺼번에 드러나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예배를 디자인할 때도 성찬을 목표로 두고 기획하는 편이에요. 예배의 하이라이트를 성찬에 두는 거죠. 그건 배워온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예배가 결국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저 나름의 확신이기도 해요.
수수예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성찬을 하이라이트로 구성한다는 건 어떤 건가요?
청원
보통 예배학적으로는 예배를 네 가지 구조로 이야기해요. 먼저 모임의 예전, 흔히 모임(gathering)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고요. 그 다음이 말씀(word), 세 번째가 성찬(table/ response), 마지막이 파송(dismissal / sending)이에요. 대부분의 예배는 이 네 가지 큰 틀 안에서 구성돼요. 흥미로운 건, 이 틀 자체보다도 그 안에 어떤 내용을 채우느냐예요. 어떤 곡을 넣을지, 어떤 말씀을 전할지, 순서를 어떻게 조금씩 변주할지 같은 것들이죠. 저는 늘 이 틀 안에서 예배를 어떻게 편집하고 디자인할지를 고민하는 것 같아요.
물론 이 구조를 깨면 안 되냐고 묻는 분들도 있어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할 수도 있지 않냐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틀 안에서 여러 요소들을 표현하는 게 더 안정적으로 느껴져요. 형식이 단단할수록 그 안에서 더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포맷이 생각보다 정말 중요해요. 예배를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할 때, 그 기본 구조가 제 사고의 출발점이 되는 것 같아요.
수수예
그렇다면 설교, 예배, 찬양에 대한 통찰 혹은 영감은 보통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얻게 되시나요?
청원
생각보다 영감은 굉장히 다양한 곳에서도 많이 얻어요. 예를 들면 콜드플레이 같은 대중음악에서도 영향을 받고, 뉴욕에 가서 미술관을 다니면서 작품에 담긴 생각의 결들을 보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고 배우기도 해요. 또 다른 분들이 드리는 예배, 특히 실험적인 예배들을 보면서도 많이 얻고요. 설교도 마찬가지예요. 같은 본문인데도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네 싶은 순간들이 계속 쌓이는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은 대부분 추상적인 영역이잖아요. 당장 만져지지는 않지만,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의 문제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상상력이라는 게 어떤 번뜩이는 순간이라기보다, 그런 재료들을 계속 무의식에 쌓아두는 과정이라고 느껴요. 여행도 그렇고, 아이슬란드에 다녀온 뒤에 세상을 바라보는 그림 자체가 달라지는 것처럼 경험의 폭이 상상력을 넓혀주는 것 같아요.
인사이트는 정말 도처에 널려 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그걸 볼 수 있는 눈인 것 같고요. 다만 목회자로서는 내가 경험한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텍스트가 있으니까 그 경험과 성경이 어떻게 서로 대화하게 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게 돼요. 내가 가진 컨텍스트가 많아질수록, 그 텍스트와 만날 수 있는 지점도 더 많아지는 것 같고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도 늘 이 생각을 해요. 그 당시의 컨텍스트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컨텍스트가 어디서 공명할 수 있을까. 그런 연결들을 메모해두고 계속 쌓아가는 과정, 그게 제가 영감을 얻는 방식인 것 같아요. 결국 저는 창의력이라는 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편집하고 배치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찬양 콘티도, 설교도, 예배 전체도 다 그 연장선에 있는 작업인 것 같아요.
수수예
주일의 예배를 디자인하는 일이 한주의 중심이 되는 목회자의 나머지 시간들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요.
청원
사실 일상은 되게 남들과 똑같아요.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 해놓고, 일주일 먹을 거 장 봐두고요. 요즘은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러닝을 워낙 많이 해서 계속 뛰고, 건강 챙기고 그런 정도예요. 특별한 걸 막 하지는 않고, 책 좀 보고 되게 심심하게 지내요. 생각보다 생활은 엄청 단조로워요. 넷플릭스도 보긴 보는데, 중요한 건 무엇을 보느냐보다 누가 보고 있느냐인 것 같아요. 같은 넷플릭스를 보더라도 “이걸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되거든요. 저는 전공이 신방과였고, 국제정치를 복수 전공해서 문화나 콘텐츠를 보는 관점이 좀 몸에 배어 있어요.
그래서 넷플릭스를 볼 때도 그냥 몰입해서 도파민 터지듯 보는 게 아니라, 계속 구조를 봐요. 이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는지, 여기서 왜 이 장면을 넣었는지, 어떤 구도와 관점으로 표현했는지요. 얼마 전에 뮤지컬 배우 친구가 “목사님은 내러티브를 계속 탐구하시는 것 같다”고 했는데, 딱 맞는 말이더라고요. 항상 연출자 입장에서 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넷플릭스도 제게는 하나의 영감의 원천이 돼요. 많이 보긴 보는데, 다음 전개가 보이면 바로 스킵하고요. 구조를 보는 게 목적이라서요. 그런 이야기 구조들이 나중에 설교나 찬양 콘티, 예배 흐름을 구상할 때 계속 접점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결국 저는 안식을 누린다기보다, 일부러 빈 공간을 만들어두려고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조용하게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쌓이게 두는 거죠.
[3부 희망을 향해 기울어진 삶]
수수예
앞으로의 목회와 사역에 대해 품고 계신 비전이 있다면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청원
학부 때 한국문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문학적 상상력은 사회가 안정될 때보다, 오히려 깨어지고 결핍이 많고 변동성이 클 때 더 강하게 나온다는 거였어요. 특히 이민 사회는 비주류로 살아가야 하고, 밀려나거나 차별을 경험하는 상태가 계속되기 때문에 그 조건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요. 그 ‘깨어짐’ 자체가 상상력을 만들어낸다는 말이었는데, 지금 제가 보고 겪는 상황들도 그 이야기와 많이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저 개인이 신분 문제를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건 아니지만, 신분의 문제가 사람들의 삶을 실제로 요동치게 만드는 장면들을 계속 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환대의 문제에 집중하게 돼요. 동시에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하게 되고요. 이 두 지점 사이가 굉장히 역설적이라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건 그 갈등과 긴장 자체가 굉장히 큰 에너지라는 거예요. 이상과 현실 사이의 낙차가 거대한 이 에너지를 신앙적으로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또 이걸 통해 현재의 문제들에 대해 어떤 현실적인 대안을 함께 세울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고민 중이에요. 지금의 미국 상황을 보면, 브루그만이 말한 예언자적 언어로는 무언가를 확장하기보다 애통하고 울어야 할 국면에 더 가까운 것 같고요. 국제 정세 역시 연대보다는 자국 이기주의로 흐르고 있어서 많이 안타깝게 느껴져요.
이렇게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접근은, 그 희생자들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어떻게 함께 울고 견딜 것인가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그게 지금 제게 허락된 바운더리라고 느껴요. 이 지점이 예언자적 상상력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개인의 이익을 좇는 현실 속에서도, 그 바깥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걸 상상하게 하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붙드는 것 말이에요.
다만 30대에 들어오면서 상상력을 훨씬 구체적이고 작은 범위로 좁히게 된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실제로 구현 가능한 방식들을 찾으려는 쪽으로요. 또 하나는, 선의만으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는 점이에요. 이 세계는 훨씬 더 복잡하고 입체적이니까요. 그래서 예언자적 상상력에 우리를 맡긴다는 건, 지금의 현실이 끝이 아닐 거라는 희망을 계속 붙드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지금 같은 시기에 그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수수예
앞서 목회자로서의 길에 정해진 ‘틀’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낯선 곳에서 새롭게 상상하는 일에는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청원
근데 사실 틀을 벗어난다고 해도, 결국 또 다른 틀 안으로 들어가게 되잖아요. 조금 더 창의적인 틀일 수는 있지만, 그걸 선택한 순간 또 다른 한계랑 함정을 마주하게 되고요. 그건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지어졌기 때문에 완전히 편안해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대신 예언자들처럼 계속 상상하고, 희망을 향해 기울어진 채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아요. 그래서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늘 자기 자리에서 불편해요. 근데 그 불편함이 다음을 보게 하는 에너지가 되죠.
중요한 건, 더 나은 걸 꿈꾸면서도 지금 내가 속한 틀 안에서는 또 성실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늘 순종이랑 저항 사이에서, 어디까지 순종하고 어디서 개길지 그 감각을 배우는 것 같아요. 그 안에서 작은 위트나 틈을 찾고요. 그래서 결국 예언자적 상상력이라는 개념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예언자적인 존재로 사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살기로 작정하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상상이 되고요. 저는 이걸 존재의 문제로 접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느껴요.
수수예
마지막으로 나눠주실 이야기가 있을까요?
청원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 완전한 무에서 뭔가를 뚝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이미 혼돈과 무질서가 있는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신 일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창세기에서도 바다, 혼돈, 공허함이 이미 있고요. 하나님은 그 카오스 안에 구분을 만들고 질서를 세워서 생명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시죠. 그래서 창조의 핵심은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인 것 같아요. 생명이 싹틀 수 있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일. 결국 창작도 마찬가지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에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뭐냐면, 세상을 향한 사랑인 것 같아요.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진짜로 사랑할 때 창의성이 나오고, 진정성이 생기고요. 하나님도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셨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창의적이 된다—저는 그 말이 제일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수수예로부터]
[수수예로부터]는 인터뷰 이후 수수예가 인터뷰이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제가 읽었던 『예언자적 상상력』이라는 책은 ‘선명한 메세지의 선포’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원님과의 대화를 통해 되려 이탈, 기울어짐, 불균형, 균열 같은 이미지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한편으로 불편함을 가진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선명함과 균형에 대한 강박은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제 처지를 잊고 있었기에 생겨났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딱한 처지에 처한 우리의 존재로서, 여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상상 너머의 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죠?
진짜 상상은 상상할 수 없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부활의 역설을 기억합니다. 청원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비밀한 일을 마음에 새깁니다.